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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계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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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2:20)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십니까?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신앙생활이 잘 정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굳게 믿으시고 그러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해나가시길 바랍니다.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을 가리키고 신약성경은 오신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흔히 말합니다. 이 말이 맞는 말이긴 하지만 충분하지는 못한 말입니다. 보다 더 정확하게 언급하자면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을 가리키고 신약성경은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과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미 2천 년 전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서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은 다시 오시는 예수님에 대해 말씀드리고 그런 다음에 이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다시 오시는 예수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주제는 매우 중대한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으신다면 우리의 신앙은 허무하게 될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다주시지 않으시면 우리 스스로 천국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가 천국으로 찾아간다는 건 100% 불가능한 일입니다. 찾아가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천국의 처소도 마련하지 못하게 됩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마련해주시고 데리러 다시 오셔야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 말씀을 보면 이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아멘.




예수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오지 않으시면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되겠습니까? 영원형벌을 받게 되는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지옥에 간다는 건 상상하기도 싫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있어 매우 중대한 주제인 겁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나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데리러 오지 않는 사람이면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히 끔직한 괴로움과 극심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조금만 아파도 견디기 힘들고, 돈이 좀 없어도 그렇고, 대우를 못 받아도 그렇고, 사람 상대하기가 어렵고 힘들고, 이래저래 조금만 답답하고 괴로워도 못 견디는데 지옥은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하고 괴로운 곳입니다.




거기에다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끝이 있지만 지옥은 끝이 없지 않습니까? 영원히 그러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곳이 지옥인 겁니다. 그러니 지옥이 얼마나 지독한 곳입니까? 얼마나 지독한 곳이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소금이 톡톡 튀듯이 괴로운 곳이 지옥이라고 하였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가복음 9장 47-49절 말씀에서 그러한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뿐만 아니라 지옥의 불꽃이 얼마나 맹렬하든지 혀에 물 한 방울이라도 적셔졌으면 할 정도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오는 누가복음 16장 23-24절 말씀입니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지옥은 이와 같으므로 지옥에는 절대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대로 지옥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해서 지옥에 가지 않게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를 우리 죄에서 구원해주시는 우리 구주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다시 데리러 오셔야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예수님께서 어디로 향하게 해주십니까? 천국으로 가게 해주십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해주십니다. 그냥 함께 해주시는 게 아니라 사망도, 곡함도, 눈물도, 아픔도 없는 곳에서 함께 살게 해주십니다.




여러 가지 질병으로 아프고, 인간관계로 마음 아파하고, 환경이 좋지 않아 아픈, 이런 저런 모든 아픔이 없는 곳에서 살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동안 힘들게 만들었던 모든 슬픔도, 괴로움도, 답답함도, 한숨도, 미움도, 그 모든 것도 깨끗하게 사라져버린 어마어마하게 아름답고 살기 좋은 천국에서 함께 살도록 해주십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4절 말씀입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아멘.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지옥에 가지 않고 예수님께서 다시 데리러 오는 사람에 해당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셔서 영원형벌 속에서 사는 게 아니라 영원행복 속에서 살아가시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이러한 영원행복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주제는 매우 중대한 주제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영원히 어떻게 살게 되느냐의 문제가 달려있기에 우리에게 있어서 엄청나게 중대한 주제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건 지구상에 있어 엄청난 사건에 해당됩니다. 마태복음 24장 30절 말씀을 보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통곡을 하면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된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보고는 통곡을 하는데 어떤 통곡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사람은 너무너무 감격해서 기뻐서 대성통곡하게 될 거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영원히 지옥형벌을 받게 되니 하늘이 무너지는 답답함으로 말미암아 슬피 울면서 대성통곡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우리 눈에는 어떤 눈물이 흐르게 되겠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은 기쁨의 눈물로 범벅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장면 가운데 사도행전 1장 10-11절 말씀을 보면 천사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아멘. 자,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 확실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오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만 세 번씩이나 앞서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3장 11절 말씀입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아멘.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 앞에 나오는 7절 말씀과 12절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아멘.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신다고 하셨습니까? 반드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나오는 “진실로”의 원어원형은 “naiv(나이)”인데 단언하는 의미에서 “확실히, 그렇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는 겁니다.




이와 같으므로 그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아무리 오지 않는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예수라는 존재도 없고 다시 온다는 이야기는 완전히 꾸며낸 이야기라고 우겨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걸 부인한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다시 오셔서 심판해주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지옥에 가게 되고 믿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말씀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리고 마태복음 25장 46절 말씀입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늘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새로 번역된 사도신경입니다.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이와 같으므로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다시 온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단 교주 등이 아무리 다시 온다고 큰 소리 “뻥뻥” 쳐도 어림도 없습니다. 죽으면 심판받아 지옥에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다시 올 수 없습니다. 다시 살아나서 다시 올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십니까? 네, 다시 오십니다.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진실로 오신다고 하셨으므로 분명하게 다시 오십니다. 다시 오셔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다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면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예수님께서 데려가심으로 말미암아 그 좋은 천국에 들어가게 되시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그 다음 주제로 넘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관한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긴 다시 오십니까? 네,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렇다면 다시 오시는 예수님께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반응을 함에 있어 한 단어를 주목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속히”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두 가지 측면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사랑의 측면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보면 “속히”라는 단어를 볼 수 있습니다. “속히”의 원어원형은 “tacuv(타퀴)”인데 “신속히, 즉시”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뜻대로 하자면 예수님께서 신속하게 이미 오셨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아직도 다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오신다는 겁니까? “속히”라고 하셨으니까 당장이라도 오신다는 겁니까? 당장 오신다고 하셨으면 이 말씀을 하신 그 당시에 즉시 오셨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말씀을 하신지 넉넉하게 잡아서 이미 2천 년이나 지났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속히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허튼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속히 오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속히 오신다고 하셨는데 아직도 오시지 않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속히 오리라”고 하셨을 때 “속히”라는 단어의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속히”는 사람이 측정하는 시간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표에 맞추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이 만든 시계와 달력으로 정해놓은 시간표에 맞추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간표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알 수 없는 시간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r계속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이러한 시간 가운데 일부를 구분해서 측정한 인간의 시간표로는 알 길이 없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표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시간표의 입장에서 “속히”는 언제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시간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와 같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8절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아멘. 또한 시편 90편 4절 말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아멘.


 


예수님께서 속히 오신다고 하셨을 때 이러한 말씀을 적용해 보면 인간 세상에서는 2천 년이 지났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틀이 지난 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속히”의 개념은 우리 입장에서 생각할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것을 사랑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만나고 나서 어떻다고 했습니까? 창세기 29장 18-20절 말씀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이처럼 사랑하면 시간가는 줄 모르게 됩니다. 야곱이 라헬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천년이 하루 같은데 그러한 건 그만큼 간절히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이처럼 천년을 하루 같이 여기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속히 오신다는 말씀 속에는 그만큼 간절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간절한 사랑의 고백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기에 하루라도 빨리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나를 사랑하시므로 당장이라도 달려오고 싶어 하는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목석같이 아무런 감정도 없이 무뚝뚝하게 있어야 하겠습니까? “오면 오고 말면 말고”라는 식이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조금 더 있다가 천천히 오시라고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이와 같으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아름다운 고백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를 사랑하셔서 나와 함께 영원히 살기 위해 나를 그 좋은 천국에 데려다 주시려고 나를 간절하게 손꼽아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더욱 더 감격해 하시는 가운데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속히”를 오래 참음의 측면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속히”라는 단어 속에는 하루라도 지체 없이 기쁘게 만나고 싶어 하는 간절한 사랑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이러한 “속히” 속에 숨겨진 사랑의 또 다른 측면이 있다는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십니까? 네,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렇다면 왜 다시 오십니까? 나를 사랑하시므로 나와 함께 그 좋은 천국에서 영원히 살기 위해 다시 오십니다. 그러면 속히 오신다고 하셨는데 아직도 오시지 않은 건 어떻게 된 겁니까? 예수님은 우리보다도 하루라도 더 빨리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 마음이시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므로 기다리십니다.


 


여기서 사랑의 의미를 또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하기에 오래 기다린다는 겁니다. 속히 만나고 싶지만 어떠한 것 때문에 참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러한 것이 어떻게 사랑이냐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랑이 맞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셨는데 얼마나 사랑하실까요? 여러 가지 표현방식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오래 참음의 측면에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실까요? 다시 말씀드려 얼마나 오래 참으십니까?




우리가 범죄하는 순간마다 사람들이 대하는 방식대로 “이에는 이” 식으로 즉각 심판을 내리셨다면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남아 있겠습니까? 돌이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을 때까지 기다려주셨기에 살아남아 있는 겁니다. 만약에 가차 없이 정죄를 하셨다면 벌써 지옥에 떨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혜택이 예수님의 오래 참음에 있는 겁니다. 이게 사랑의 또 다른 양상인 겁니다. 우리에 대한 오래 참음이 바로 사랑을 하신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처럼 “속히”라는 단어 안에는 당장이 아닌 오래 참음이란 역설적인 덕목이 숨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을 얻게 되어 그 좋은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함께 살게 되는 겁니다.




이와 같이 “속히”라는 단어 안에는 오래 참는다는 역설이 숨겨져 있습니다. “속히”라고 해서 즉각 행동에 옮기는 게 아니라 맞대응하지 않고 오래 참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오래 참음이란 덕목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가운데 사랑에 관한 말씀인데 4-7절 말씀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아멘.




사랑은 어떻다고 하였습니까? 이러한 사랑의 정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이곳에서 말씀하고 있는 정의대로 지킨다면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사랑의 정의 가운데 참는 것과 관련해서 살펴보면 처음에 시작하면서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하였으며 마지막에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하였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오래 참아주는 게 사랑이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사랑의 정의처럼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사 오래 참아주시는 겁니다. 베드로후서 3장 8-9절 말씀에서 이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아멘.




또한 베드로후서 3장 15절 말씀 가운데서도 볼 수 있습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아멘.




이처럼 “속히”라는 단어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즉시가 아닌 오래 참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오래 참아주시는 겁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다 회개하여 구원을 얻기를 바라시고 즉각 응징하지 않으시고 돌이킬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겁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해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 5장 7-8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아멘.




우리는 이처럼 예수님의 강림을 길이 참아야 하는 겁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서나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말씀에 대해서나 이웃에 대해서도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2절 말씀입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아멘. 그리고 마태복음 24장 13절 말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아멘.




이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오래 참지 못하고 조급하면 일을 그르칩니다. 일을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성급하면 축복이 날아갑니다. 인간관계도 날아갑니다. 그러므로 오래 참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조급증이 생긴 사람들은 오히려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더 크게 바라보고 언약을 더 크게 바라보고 미래를 더 크게 바라보지 못하고 참지 못해서 그런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겁니다.




하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는 믿고 참고 견뎌냈기에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결국은 언약을 받은 대로 축복의 땅인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오래 인내하면서 소망 가운데 살았기에 언약이 성취되었고 축복을 받게 된 겁니다. 그만큼 오래 참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오래 참을 때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됩니다. 그러나 참지 못하고 인간적인 감정에 치우쳐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사태를 수습하고 당장 뿌리를 뽑으려고 한다면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도 깨지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역시 나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직접 나서서 해결사 노릇을 하려고 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시길 오래 참고 기다릴 때 오히려 문제는 해결 받고 언약은 성취되는 겁니다. 이처럼 오래 참으면 복을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도 오래 참았습니다. 히브리서 6장 13-15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아멘.




이와 같으므로 당장 어떤 결말을 보아야 한다는 생각은 삼가야 하는 겁니다. 당장 뿌리 뽑아야 속이 시원하겠지만 꼭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오랜 시간 후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으므로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에 대해서도, 심지어 사람에 대해서도 오래 참아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든 사람과의 관계든 당장의 응답이나 변화가 없어서 다소 괴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날 수도 있지만 신실하신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믿고 나아가면 때가 되면 해결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오래 참는 가운데 말씀대로 살아가면 그동안 이 모든 것을 지켜보신 하나님께서 선물보따리를 마련해두셨다가 때가 되면 주시는 겁니다.


 


이와 같으므로 에베소서 4장 2절 말씀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 말씀에서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이렇게 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마음으로는 부족하기에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예수님을 통해 부어지는 성령님의 열매로 말미암아 더 잘 오래 참게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아멘. 성령님의 열매 가운데 “사랑”과 “오래 참음”의 열매로 우리는 비로소 더 잘 사랑할 수 있고 더 잘 오래 참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속히”에 대한 개념을 잘 정리해놓아야 시험에 덜 들게 됩니다. 언약이 성취되기까지 오래 참게 됩니다. 여러 가지 현실 가운데서도 오래 참고 극복하게 됩니다. 이웃에 대해서도 온유한 심정으로 오래 참아주게 됩니다. 사람이 성급하게 나서서 일을 그르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께서 나서서 역사해주시고 해결해주실 때까지 오래 참게 됩니다. 또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길이 참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긴 오십니까? 네,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나를 사랑하사 천년을 하루같이 여기시고 손꼽아 간절히 기다리시는 예수님께서 나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 다시 오십니다. 언제요? 예수님께서 때가 되면 반드시 속히 오십니다.




“속히” 오신다고 하셨는데 이러한 “속히”에는 두 가지 측면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간절한 사랑이며 하나는 오래 참음의 사랑입니다. 이처럼 “속히”는 역설적으로 즉시가 아닌 오래 참음이 담겨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오래 참아주심으로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즉각 응징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죄 가운데 멸망당하지 않도록 해주셨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께서 언제 오시든지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 마치 신부가 신랑을 간절히 기다리듯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사랑의 고백을 하는 가운데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길이 참으면서 감격 속에서 간절히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너무나 기뻐서 대성통곡하는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어떠한 고통도 없는 그 좋은 천국으로 영접해주셔서 예수님께서 계시는 그 곳에 우리도 함께 있게 해주시는 광경도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를 즉시 찾아오셔서 데려가고 싶지만 하나님의 때가 찰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예수님도 떠올려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나를 사랑하사 오래 참아주시고 나를 위해 그 좋은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도록 나를 데리러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더욱 더 간절히 소망하고 길이 참고 감격해 하시는 가운데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르짖어 기도드리셔서 성령님의 오래 참음의 열매를 더욱 더 충만하게 받으셔서 하나님에 대해서나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에 대해서나 환경이나 사람에 대해 더 잘 오래 참으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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