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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가진 것 (고후6:6-7)

본문

바울이 가진 것/고후 6:6-7


 


 


<설교>


진짜처럼 보이려고 꾸미거나 만들어 낸 것을 가리켜‘가짜’라고 합니다. 가짜는 진짜를 모방하고 진짜처럼 행세하지만 진짜의 기능과 효과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만약 가짜라 해도 진짜를 모방하는 수준이 아니라 진짜의 고유 기능과 효과를 전혀 모자람이 없이 그대로 발휘한다면 가짜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굳이 진짜와 가짜를 분별해야 할 이유도 없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의 기능과 효과를 그대로 간직하고 발휘하는 가짜는 세상에 없습니다.


 


 


성경에도 가짜와 동일한 의미로 거짓이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거짓 사도, 거짓 선지자, 거짓 증인, 거짓 그리스도라는 말들이 그러합니다. 세상에는 가짜 사도, 가짜 선지자 등이 등장했다는 것이고, 따라서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거 했던 복음이나 예언들도 모두 가짜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를 부활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의 실상인 죽음에 그대로 머물게 하는 가짜일 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그리고 사도와 복음에 대해서만큼은 온 힘을 다해 무엇이 참된지를 알아가며 바르게 분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를 위해 신자는 성경이 증거 하는 복음의 의미와 본질을 인간의 입장이나 이익이 아닌 오로지 우리의 구주이신 그리스도가 못 박히신 십자가 은혜에서 배워야 합니다.


 


 


십자가 은혜에서 배우게 된 복음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목적이 아닌, 우리를 지으시고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게 합니다. 나의 구원과 복에 목적을 두고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이라는 것에 열심을 내었던 것이 모두 헛된 가짜 신앙이었음을 알게 하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마음을 두게 하는 것이 참된 복음입니다.


 


 


그래서 참된 복음은 세상으로부터 멸시받고 외면당합니다. 인간이 원하고 기대하는 믿음의 보상이 없고 인간의 육신을 이롭게 하는 내용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복음의 내용이 재미가 없고 신앙생활의 맛이 없다고 생각되기에 자신의 이익과 감정과 기분을 따라 가짜를 진짜로 인정하며 따라가게 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참된 복음을 증거 한다면 그 길에서 외로움과 고난은 반드시 겪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까지도 세상이 죄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하나님의 원수임을 나타내는 증거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임을 생각한다면 신자는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도구로 열심히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의 중심에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생생히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부흥, 성장 따위에는 관심이 아예 없었다는 뜻입니다. 교회에 십자가를 증거 했던 것도 교회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십자가로 증거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전하는 도구로 충실히 사용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도의 마음으로 오직 복음만 증거 하는 참된 사도가 누구인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도 됨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4,5절)라는 말로 자신이 처했던 형편을 주저함이 없이 말합니다. 세상이 실패와 저주로 간주하는 형편도 바울에게는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어서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6,7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난에서 어떻게 무엇으로 인내하고 승리하였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말은 바울을 비난하는 교회에 아무런 가르침이나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바울이 가졌다고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졌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도로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가진 것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울이 가졌다고 하는 것은 바울이 어떤 사도인가를 증명하는 도구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교회가 알아주고 대접하는 사도가 되려면 교회가 인정하는 가치 있는 것을 가져야 합니다. 깨끗함, 지식, 오래 참음, 자비, 그런 것보다는 언변이 뛰어나고 좋은 외모와 풍채를 가지는 것이 더 낫습니다. 고난보다는 형통해야 하고 세상이 능력으로 인정하는 것을 가져야 합니다. 그랬으면 비난이 아니라 참된 사도로 높임 받으며 순탄한 길을 갔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의 믿음이나 신앙생활을 판단하고 말할 때 보게 되는 것은, 우리 기준에서 신앙으로 인정할 수 있는 외적인 것이 있는지를 기준으로 합니다. 가령 기도 생활에 힘쓰는지, 주일성수는 잘하고 있는지로 신자 됨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신앙 좋은 신자로 인정받으려고 신앙생활에 힘쓰는 것도 있게 됩니다. 교회가 인정해주는 신앙생활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바울이 가졌다고 하는 것들은 관심 밖의 문제일 뿐입니다. 자신을 치장하여 돋보이기에 하는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졌다고 하지만 그 의의 무기는 바울을 힘있고 능력 있는 사도로 세상에 나타나게 하는 도구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 주신 것은 바울을 교회로부터 사도로 인정받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복음의 증거를 위해 필요한 것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고 오늘 이 시대에 신자로 부름 받은 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인정해주는 가치 있고 힘 있는 것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과시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인간의 뜻이며 욕망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신자 됨의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송받는 것에 신자 됨의 의미를 두기 때문에 자신을 높이고 아름답게 치장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이러한 기준과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이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은 전혀 인기 없는 것으로 외면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졌다는 것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 등의 자신을 과시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능력으로 상상하고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의의 무기가 십자가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아마 십자가를 귀신을 쫓아내는 용도쯤으로 생각하지 않을까요?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으면 귀신이 덤벼들지 못한다는 주술적인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고유 기능과 효과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가짜 십자가이고 이러한 십자가를 말하는 복음 또한 가짜이고 이것을 복음으로 내세우는 이 역시 가짜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가짜는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치장용으로 활용되는 것입니다.


 


 


고전 4:9-13절을 보면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난을 사도 됨의 증표로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도를 죽이기로 작정 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시고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게 하신 것은 사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존귀한 자리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이 필요한 자를 위한 고난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믿음에 대한 큰 오해가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을 나를 위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는 것에 의미와 목적을 두는 것이 그것이고, 가지게 된 것으로 자신을 치장하여 다른 사람보다 더 우월한 자리에서 자기를 과시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 또한 그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가짜를 가지고 치장하고 과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바울은 갈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자기 욕망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살려주시고 살게 하시는 것으로 바라봅니다.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게 하는 것도 살게 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이라면 우리는 도무지 ‘나 믿음 있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세상이 말하는 착한 마음과 선한 행실, 교회 생활의 열심, 이런 것으로‘믿음 있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믿음을 멸시하고 훼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참된 믿음 앞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생각했던 모든 것이 가짜로 드러남을 아는 것이 믿음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합 3:17-18절을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하박국 선지자는 신자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열매나 소출, 즉 재물이 부요해 지는 것으로 말하지 않고 구원의 하나님 한 분으로 말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받아서 기쁜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기쁨이 된다면 세상의 성공과 발전과 소유를 확장 시켜주는 하나님으로 기뻐하겠다는 발상은 사탄의 속성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속성 그대로 하나님을 찾는 이들에게는 십자가만 증거 하는 복음은 따분하고 밋밋하고 재미없는 내용일 뿐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부합되는 복음이 아닌 가짜 복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사도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하나님이 택하여 부르신 대상들에게 전달하고 나누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도의 개인 업적이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 사용될 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도 직분을 통해서 신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을 사도로 부르신 것처럼 우리를 신자로 부르셨다면 바울이든 우리든 부르신 의도가 다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우리가 기대하고 소망하는 행복한 인생을 위한 부르심이 아닌 것은 분명 하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행복하고 재밌는 인생을 원하십니까?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 그러한 소원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만 자신을 그러한 소원을 누릴 자격이 없는 죄인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천국과 구원조차도 자신이 누릴 몫이 아님을 아는 그들에게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세상에 남기신 피의 사건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지게 된 의의 무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이 말한 의의 무기는 우리를 세상에서 우월한 자리에 앉게 하거나 신자 됨을 과시할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사도가 사도의 직분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진 것으로 말하지만 교회는 바울이 가지고 있는 것의 의미와 가치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 밖에 벗어난 것으로 비난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사도는 무엇입니까? 신자는 또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부름을 받았다는 것만 생각해 보십시오. 모두가 복음을 위한 종으로 존재할 뿐이지 개인의 영광이나 자랑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봉사를 하고 성과를 얼마나 이루었는지의 문제는 믿음의 정도나 신자 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될 정도로 고난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사도의 실력이나 자격의 문제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한 곳에 복음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습니다. 우리를 세상에서 잘난 자로 인정받게 하는 능력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고 저주에 갇힌 자를 구출하여 생명에 있게 하신 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로 기뻐하고 감사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세상으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고 어떤 형편에 있다 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가질 수 없고 가지지 못한 의를 가진 자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두가 불쌍한 자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 은혜 안에서 함께 하고 만나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가 십자가는 덮어 버리고 세상이 의로 인정해주는 도덕과 윤리로 자신을 치장하려고 합니다. 십자가 믿음이 윤리와 도덕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가짜 십자가이고 가짜 믿음입니다.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주어지는 십자가의 의로움만으로는 안되고 윤리와 도덕의 실천으로 의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믿지 않는 자에게서도 얼마든지 나타나는 윤리와 도덕을 교회 됨의 증거로 삼는 비참한 현실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의의 무기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내세우며 세상과 싸우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힘이 되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하며 그것으로 경쟁하고 비교하고 판단할 때 신자는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님의 의가 생명이고 진리이며 인생의 모든 것임을 믿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알아주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주께서 우리의 인생을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의가 가장 복된 것임을 전하는 용도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과 같은 기준과 시각으로 서로를 판단하거나 비교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충실했습니다. 여러분도 신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그 뜻에 충실하십시오. 저도 저를 신자 되게 하시고 목사라는 역할을 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그 뜻에만 충실하겠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아닌 말씀을 기준으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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